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주님을 따르는 길 - 거듭남3편 완결 - 김용의 선교사
    설교요약/김용의선교사 2018. 11. 15. 11:31



    주님을 따르는 길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는 사람들 아야 시작도 못해보는 사람들 태반이고 그중에 하려고 하지만 부자관원처럼 털썩 주저앉는 사람들....

     

    주님으로 믿을 거냐? 못 믿을 거냐 둘 중에 하나지 믿을까하노라 믿을는지 모른다 믿을라고 그런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못 따라갑니다. 그러면 평생 준비운동만 하다가 죽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느냐? 애기는 간단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앞서서 말한 분명히 해답이 그 길이고 운명이 그 길인데도 불구하고 못 따라가는 부자관원같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듣기 싫어하던 좋아하던 십자가의 복음을 계속 외쳐야 되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 이 길 말고는 살아계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과격하고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그것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병든 자아

    아모스 519절에 보면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어떤 사람이 나갔다가 사자를 만난 겁니다. 그러면 무슨 상황이 생기겠습니까? 날 살려라 하며 정신없이 도망쳐 큰 나무 뒤로 휙 몸을 날렸습니다.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사자가 못 따라왔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생존 본능이 있는 사람입니까? 사자를 따돌렸으니깐 내가 사자를 따 돌렸구나? 이러고 안심을 하고 있으니깐 생각이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몸을 날렸는데 어디 부서지거나 깨져야 정상인데 왜 이렇게 푹신하지? 그래서 뒤를 돌아서 무엇인가 만지니 부드러운 털이 만져졌습니다.

     

    보니깐 곰 품에 뛰어든 것입니다. 사자를 피하다가 곰 품에 뛰어든 것과 같고 하여튼 그 상황도 피해자기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무슨 재수 없는 일이 겹쳤지만 그 상황을 다 피한 자기가 스스로 대견해 하며 내가 여기서도 살아남았구나 하며 안심하고 있을 찰나에 뱀에 물려 죽었다 이런 얘기입니다.

     

    여러분 사업에는 성공했는데 인생에는 실패한 사람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주변에 꽤 들리죠?

     

    사역에는 성공했는데 가정에는 실패한 사람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대단한 유명한 기독교의 지도자인줄 알았더니 아뿔싸 죄 짓고 졸지에 주저앉은 사람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사자도 피하고 곰도 피했는데 다른데서 망한 것이 아니라 제 집구석에서 거기 숨어있는 뱀에게 ...

     

    뱀에게 물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넋을 놓고 앉아야지고 저것도 이겼고 이것도 이겼으니깐 안심하고 있다가 제집에서 뱀에게 물려죽은 이 비참한 운명 여러분 그러니깐 인생이 수많은 환경과 조건에서 우리가 서로 이겨내고 살아냈다고 해도 우리 인간에게서 진정한 구원이 필요한 것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질병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면 사람 바뀔 거다.

     

    우리가 안 바뀌는 이유는 우리가 죄 짓고 살고 우리가 헷갈리고 흔들리고 사는 이유는 환경 탓이다. 사람 탓이다. 가족 탓이다. 이렇게 환경 탓 하지만 인간은 환경을 아무리 바꿔줘도 여러분 그것으로는 절대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는 역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종살이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적인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애굽에서는 건짐을 받았는데 그러나 놀랍게도 눈앞에 보이는 바로보다 광야 사십년에 밝혀진 결론은 바로가 눈앞에서 홍해 바다 물에 빠져죽은 바로 그놈보다 더 무서운 바로가 내안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은 겁니다.

     

    오직 태어나서 그 탐욕으로 오직 자아만족과 자아추구를 위하여 내 만족을 위하여 남편을 골랐잖아요. 사랑하니 뭐니 별소리를 다해도 결론은 결국 나 위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자식도 나 위해서 골라 나아잖습니까? 똑같은 자식인데 어떤 자식은 배속에서 지워버리고 어떤 자식은 낳아서 물고 빨고 사랑하는 것은 괴이한 일 아닙니까?

     

    로마서 132절에

    그들이 이 같은 일(살인)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런 일에 해당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저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괴로우니까 그러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옳타옳타 하느니라

     

    계명에 대해서 주님이 설명할 때 여자를 보고 음욕 하는 자마다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형제에 대하여 악하다. 미련하다 분노를 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 하였느니라 우리는 죄의 열매만 가지고 있느니 없느니 그러지만 이 존재적 죄가 없이는 그런 행위의 열매가 맺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인가?

    존재적 죄인이 주님의 의 없이 십자가의 극단적인 이것 없이 구원 받는다는 말 있을 수도 없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무수히 말하는 겁니다. 행위로는 구원 못 받는다고요.

     

    전지한 주님이 나 같은 놈을 살리는데 하필이면 십자가 입니까?

     

    왜 하필이면 예수입니까? 이것을 조금만 진지하게 고민만 했어도 이렇게 대강 지나가는 신앙생활인지 종교생활인지 알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주님 편에서 한번 고민해보자고요 여러분과 저 같은 놈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고민하셔야 하는데 거룩한 하나님이 당신을 부인할 수 없어서 심판은 반드시 내려야 하는데 당신의 의를 채울 자가 누구도 없어 남은 해답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하나를 선택하려면 감상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 대신 잡는 주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고는 우리를 구원할 길이 다른 길이 없어 이것을 무슨 방법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해도 미쳐도 당신의 아들까지 나를 이렇게 사랑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님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하신 자체이신 하나님이 영원가운데 단 한 번도 연습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



    불가능한 존재

    모태신앙 중에 모태신앙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성자수준에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울입니다.

     

    로마서7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정직하게 본 사람들은요 말씀 좀 지켜보려고 몸부림 한 사람들은요 내가 얼마나 존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적 죄의 장아찌인지 누가 말 안 해도 자신이 압니다.

     

    난 끝장이구나? 이렇게 존재적 죄인으로 나의 실존이 들어났을 때 우리는 그때 턱없이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

    이때 주님께서 우리를 조용히 이끌어주시는 곳이 십자가 앞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성경이 선언을 합니다.

     

    로마서 6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하나님 앞에 나는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죄인임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주님 바라볼 때에 은혜라는 단어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일이 뭡니까?

     

    이일은 이미 구약에 결론으로 예언이 되어있었습니다.

     

    이사야 53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한 것입니다. 나를 그 완전한 그 공의에서 구원하시려면 덜렁 와서 목숨만 대신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과 삶을 포함한 것을 사람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 생명을 대속한다는 말은 단순히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부를 책임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아야 할 나의 삶은 어느 순간이냐?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놀랍게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 너 내게로 오라 십자가로 오라 이 말은 역사가 객관적으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너는 믿음으로 이 믿음으로 참여하시란 말입니다.

     

    내 삶을 나라고 이루어왔던 것을 자아의 병든 나의 삶이 예수님 벌겨 벗겨지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찢기고 숨이 떨어져 죽은 것처럼 내가 주인 되어 살아온 병든 자아에 대하여

     

    오직 나 이렇게 살아왔던 병든 자아에 대하여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다는 말은 주님의 죽음이 픽션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객관적 실제 사건인 것처럼



    실제가 된 사람

    요한복음 168절에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의 영혼을 책망하셔서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실제가 되게 하사

     

    나 자신에 대하여 죽게 하시는 성령님이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온전히 받아드리되 교리적인 동의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끈적끈적 그것만 건드리면 내가 죄인 되어 살아왔던 존재에 대하여 그 썩은 병든 자아에 대하여 내가 주인 되어 살아왔던 자아에 대하여

     

    주님 양이 죽을 때 각을 뜨고 내장을 꺼내고 가죽을 벗기고 피를 쏟고 완전하게 죽은 것처럼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나의 모든 것을 처리하신 것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

     

    예수님 죽음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서 주님 이제 나는 주님과 함께 죽고 이제 부활하실 때에는 내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 나의 생명의 전부가 되어 주님이 내안의 전부가 되어

     

    나의 생명이 되어 부활하셔서 이제 나아니고 내안에 주님사시는 이 놀라운 새 피조물 거듭남 이 새 생명으로 이제 내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긍정의 힘 적극적 사고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내안에 나를 사랑하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와 연합하여 나와 함께 죽은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전부가 되어 주체가 되어 살아가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이게 바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지 않고 통과할 수 없습니다. 죽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병든 자아가 마음 안에서 사형집행을 당해야 내가 죽고 예수 산 믿음이 실제가 되어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이런 삶이 실제가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말합니다. 난 예수와 함께 죽었다 내안에 예수가 사신다. 오직 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만이 나의 실존이다.

     

    여러분 이렇게 고백한 그야말로 복음의 실제였고 2000년 역사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순교를 하고 상황을 걸어가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로...

     

    누가 보면 설명 필요 없이 저거 예수쟁이야 저거 예수 냄새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 죽음이 확실하게 실제가 된 사람에게 복음의 향기가 들어나게 돼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를 날마다 감상도하고 은혜도 잠깐 받고 여러 가지 고민도 하셨을 테고 가끔 필요하면 거기 가서 회계의 눈물도 흘리셨을 텐데...

     

    여러분은 한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따르시는 분입니까? 아니 앞으로도 어디든지 따라 가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의지를 가진다고 해도 십자가가 실제가 되지 않으면 눈물겹게 사모해도 불가능합니다. 걸려 넘어지는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내 빌어먹을 자아가 발목을 걸면 못 따라 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고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자유인입니다.

     

    할레루야 여러분 주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멘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여러분 언제 자신에 대하여 주님의 죽음이 역사적 객관적 사실 인 것처럼 언제 죽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말은 여러분이 언제 안수 받으셨냐? 언제 성령 체험했냐? 이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백번 동의 하셔도 이 복음 실제가 되려면 죽음이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이 길을 위하여 십자가 앞으로 이복음의 앞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여러분 양심을 통하여 영혼을 통하여 이 죽음을 처절히 받아드리셔야 그래야 부활이 있습니다.

     

    믿음은 양면입니다. 주님의 죽음에 실제로 참여하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에게 나의 주권을 넘겨드리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십자가의 부활은 먼 얘기가 아니고 교리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실제가 되어 예수생명 살아내는 갈라디아서 220절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된다. 이말 입니다. 아멘입니까?

     

     

    변하려고 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나의 존재를 어떻게 할지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어요. 나 정말 이제야 받아드리겠어요 예수님 죽음이 내 죽음 이였군요.

     

    십자가가 예수님 죽은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십자가군요.



    맺은말

    사람들에게는 꾸미고 위장할 수 있지만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결단의 연속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진리로 인도하신 주님 앞에 여러분 어느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부자관원의 선택을 하실 수 있고 또는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선택한다면 이제 여러분이 부둥켜안고 애착을 느끼던 병든 자아의 마지막 미련의 끈을 죽음에 처박아 넣어야 합니다.

     

    이미 사실인데 내 마음으로 받아드릴 수 없었던 제 아내의 암 병처럼 여러분의 이미 죽은 병든 자아에 미련을 두고 여전히 붙들고 있는 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죽음에 온전히 받아드리고 주님 내가 아까워하던 나 자신에 대하여 변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하여 죽음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나의 전부가 되어주십시오.

     

    내안에 나는 죽고 예수 사는 이 사실자체를 전부로 받아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분 이미 그 고백이 실제가 되신 분이라면 여러분 기쁘게 즐거이 이 고백에 대하여 주님이 이루신 일을 찬양하고 다시 한번 확증합시다.

     

    맞습니다. 난 당신과 함께 죽었습니다. 막연한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여러분의 병든 자아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며 그리고 이제 주님 안에서 이제 내안에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을 부분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생명이 되어서 나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기도

    주여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십자가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의 초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복으로의 초대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 울어도 몸부림 쳐도 안 되던 나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주여 오 주여 우리영혼을 배부른 영혼 위기가운데 있는 내 영혼 주님 보여주셔서 이 자아에 병든 자아에 원수 같은 이 자아에 주님 속아 질질 끌려왔던 나의 삶

     

    이 병든 나의 자아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에 자랑 오직 내가 주인 되어 살아왔던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포 합니다.

     

    오 주님 죄의 종노릇하며 하나님 앞에 반역하며 눈가림하며 가면무도회 하며 주님 생명으로 따르지 못했던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내가 주인이 되어 여전히 연민하고 자기 우울증 걸리고 자살충동 느끼고 간음과 음란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모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이 모든 악독한 병든 자아의 죽음을 주님 받아드리고 오 주님과 나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오 진리의 성령님 내 영혼을 십자가 앞으로 더욱 인도하사 주님의 아름다운 그 영광 보기까지 주님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사랑하는 주님 여기 두 손을 든 영혼의 모습을 주께서 아시고

     

    내 영혼의 십자가의 앞에 서서 결단하는 나의 믿음을 보시는 주여 이제 이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신 일을 주님 우리 안에 이루사

     

    결코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이 십자가의 진리 앞에 우리를 철저히 세우셔서 우리의 가면무도회 가면을 벗기시고 우리의 가죽을 벗기시고 각을 뜨시고 내장을 꺼내시고 물로 씻고 불로 태우듯

     

    우리 병든 자아의 흔적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함께 넘기게 하시고 이제는 부활생명 예수 생명 나의 전부가 되어주셔서

     

    내가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 사는 이 놀라운 일에 진리의 성령님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부활의 영광의 진리가 이제 내안에 관념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건 순종에 믿음으로 여기에 참여하오니 성령이여 내안에 이일을 확증하시고 인을 치시고 주님 나를 감동하시어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십자가로 나를 계속 인도하여 주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나를 초대하신 나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생명으로 나의 전부가 되게 하사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Designed by Tistory.